이완용 집이 불타오르는 연기가 르쁘티신문 화보에 실렸다

이완용 집이 불타오르는 연기가 르 쁘티신문 화보에 실렸다

프랑스 신문들이 기록한 1907년 고종 양위 및 이완용집 화재와 항일사건

 

한불통신) 1905년 대한제국 외교권이 박탈되었다. 지금으로 치면 대한민국정부 외교권이 강제로 일본에게 귀속되는 강제로 어거지로 체결된 조약이다.  우린 이를 을사늑약으로 칭하고 있다.

고종정부는 을사늑약 2년 후 네덜란드 헤이그 2차 만국평화회담에 3인 특사를 파견하지만 정식 발언권조차 얻지 못한다. 하지만 일본 이토 히로부미와 이완용은 이를 구실로 고종을 하야시키고 순종을 왕으로 올리는 동시에 군사권과 경찰권이 일본에게 넘긴다는 내용이 들어있는 정미7조약을 체결하고 만다.

고종 양위 주장은 일본본토로 부터 압력을 받은 이토 히로부미가 아니라 이완용 당시 총리대신 양위제안으로 시작된다. 이로서 이완용은 을사5적에 이어 매국노의 대명사로 불리게 된다. 이완용은 덕수궁에서 총리대신으로서 그리고 궁내부대신 임시 서리로서 순종도 없는 상태에서 즉위식을 주관했다. 이완용이 순종 즉위식을 주관한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반이완용 데모와 이완용 화형식은 전국 각지에서 격렬하게 진행되었다.

순종의 황제 대리 의식이 있던 7월 20일 그리고 4일이 지난 7월 24일 대한제국 군사 수백 명과 시민 및 반일단체들이 덕수궁 정명전에 몰려가 “황제께서는 양위를 거부하고 망국 역도를 직참하소서”라고 큰소리로 외친다.

사진1은 중명전에 거주했던 고종과 순종이 테라스에 나와 길거리에서 국민들이 외치는 소리를 듣고 있는 장면을 프랑스 기자가 찍은 사진으로 9월 7일자 일러스트라시옹 전면에 실었다.

 

사진1) 1907년 9월 7일자 일러스트라시옹 중명전에서 고종과 순종, 중명전은 2015년 보수작업으로 현재 박물관을 사용

거리 곳곳에서는 격앙된 군중이 일본인 경찰과 충돌하여 유혈싸움이 벌어졌고 대한제국 군인과 군중들은 종로경찰서를 습격하여 일본헌병을 사살했다. 프랑스 르 쁘티쥬르날에 의하면 한국인쪽 사망자는 100여명이고 사상자는 200여 명으로 추정되고 있다고 밝혔다. 일본인 피해자는 극소수로 발표되었지만 믿을 수 없는 보도라고 기록하고 있다.

1907년 9월 7일자 일러스트라시옹 신문은 일본과 쿠테타적 충돌에서 한국인 100여명이 사망 했으며 동대문 밖에 시신을 놓아 친구나 가족이 찾아 갔다고 보도하고 있다.

한양의 수 만의 시민은 상가를 철시하고 덕수궁에서 2킬로미터도 채 떨어지지 않은 이완용의 남대문 밖 중림동 집으로 몰려가 집을 완전히 불살라버렸다. 사진2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는 장면이 총리대신 이완용집이 불타는 장면으로 신문은 언급하고 있다. 또 시민들은 친일단체인 일진회의 기관지 국민신문사를 습격하여 사옥과 인쇄공장을 파괴했다고 ‘광화문 아웃사이더’ 허근욱(허헌변호사 딸)은 말하고 있다.

사진2) 1907년 9월에 르 쁘트 쥬르날에 실린 화보에서 총리대신 이완용이 집이 불타는 검은연기를 볼 수 있다고 신문은 언급하고 있다.

정미7조약 반대 시위가 1907년 말까지 전국에서 일어난다. 이로서 일본은 반란이 일어날 수 있는 모든 항일조직들을 한일합방이전에 아주 잔혹하게 제거했다.

 

한불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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