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경찰이 기록한 서영해 기록 발견

프랑스 경찰이 기록한 서영해 기록 발견

한불통신-ACPP) 수많은 불문기사와 저술활동을 통해 한국독립이 왜 필요한가를 끊임없이 주장한 서영해(본명 서희수1902-?)를 프랑스 경찰이 남긴 기록을 문서고에서 지난해 7월 찾았다. 이 문서에 대한 검증 과정을 거쳤다. 관련된 또다른 문서를 추가적으로 찾아 내기도 했다.  아래는 경찰청 문서를 중심으로 서영해 친척을 통해 확인된 사실과 프랑스에서 발간된 자료를 기초하여 작성하였다.

1936년 11월 23일 프랑스 경찰청은 서영해를 중국기자로 기록하고 있다. 출생지는 부산 Fusan (Corée) 태어난 장소는 <<Chuck Téhon>>이라고 적고 있다. 이 지명은 불어식 발음으로 기록한 것이다. 이 발음으로 가장 근접한 동네이름을 찾아보았지만 지금의 부산지도에선 이 지명을 찾을 수 없다.

1936년 프랑스 경시청이 서영해를 조사한 문서

1902년생이지만 프랑스 기록은 1904년 1월 13일 생으로 기록하고 있다. 추측컨대 프랑스 초등학교를 입학하기 위해 나이를 낮춘 것으로 짐작하고 있다. 완벽한 불어습득을 위해서 프랑스 초등학교에 입학하였고 6년 만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칼로레아를 거쳐 소르본 문학대학에 입학 하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시는 바람에 학비가 없어 학업을 중단한다. 콩쿠르에 당선되어 그 상금으로 언론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고 서영해 친척은 밝히고 있다.

서영해의 원국적은 한국(Coréenne)이지만 1919년부터 중국국적이라고 밝히고 있다. 부산 3.1운동의 주동자로 일제헌병으로 쫓겨 신의주를 통해 상해임시정부에 합류한다. 한약방을 운영하고 있는 서영해 아버지는 부산 중국인 화교 초등학교에 입학시킨다. 청일전쟁으로 부산에 화교들이 정착하면서 화교가 세워졌다고 한다. 화교에서 배운 중국어는 신의주 국경을 통과할 때 유용하게 사용했으며 상해임정에서 망명허가를 위한 인터뷰에서 유감없는 실력을 발휘했을 뿐만 아니라 1932-3년 제네바 국제연맹에 일본이 만주사변을 일으켜 침략한 사실을 중국대표단을 설득해 이승만이 한국대표로 공식 발언권을 행사하게 만든게 서영해의 중국어 실력이다. 이로서 국제연맹에 한국인 연설로 첫 기록을 남긴다. 이승만 대표는 중국 만주에 100만 명의 한국주민들의 보호를 받아야 함을 주장하며 일제국의 침략 및 야만성을 국제연맹 회원국에 알리는 계기가 된다. 일제는 만주사변으로 국제연맹에서 탈퇴한다.

이승만 대표연설이 들어있는 1933 국제연맹 프랑스 외무부 공식신문

서영해는 1920년 12월 13일 프랑스에 도착했다고 적고 있다. 3.1운동 이 후 1년 6개월의 시간이 지난 후다. 공식적으로 외국인 등록을 마쳤고 파리 주소지를 기록하고 있으며 월세로 얼마를 지불했는지 기록하고 있다. 파리 15구에 한국인 많이 살고 있는데 서영해도 보베학교를 마치고 15구에 거주했음을 알 수 있다.

1934년 1월부터는 파리 소르본 라탱지역에 거주하기 시작했으며 언론학교를 졸업하여 기자가 되었으며 그 직업으로 살고 있다고 언급하고 있다.

서영해는 언론학과를 졸업함과 동시에 고려통신사(Agence Korea)를 설립한다. 한국에서 발행한 일간지«Bough Ibba»와 뉴욕에서 발행한 신문 «더 뉴코리아The New Korea»에 기고했으며 ‘’이집트 화보Revue Egyptienn’’신문에도 기사를 송고했으며 1928-9년에는 노벨문학상 수상자 로멩 롤랑Romain Rolland이 발행한 «유럽L’Europe», 공동작업자로 활동했다. 1928년 프랑스 문학정보지 «몽드Monde»에도 기고를 하는 등 경찰 보고서는 기록하고 있다.

서영해는 프랑스 경찰에서 감시를 받은 인사였다. 전쟁 및 파시즘 반대운동 조직에서 위원으로 활동하였다고 문서는 밝히고 있다. 1940년 불독 전쟁으로 프랑스가 점령되자 반 나치 레지탕스 활동을 하였다. 평소에 일본제국대사관에서도 감시를 받아왔던 그는 1941년 파리 감옥에 6개월 투옥되었다고 한국 언론 인터뷰에서 밝힌 바 있다. 하지만 서영해가 투옥된 자료를 발견하지 못하고 있다. 다만 지하에서 무명의 이름으로 반나치 언론활동을 했음을 짐작하고 있다.

서영해가 조사를 받은 1936년은 유럽 및 세계정세가 격동의 시기였다. 히틀러 나치당의 일당 독재체제가 확립되는 시기였으며 프랑스는 첫 좌파정부가 정권을 잡았지만 파시즘 및 아나키스트, 러시아 공산주의 등 이데올로기 충돌이 심하게 요동치고 있었다. 일제국은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키고 다시 1937년 중국 상해 침략 계획을 세우고 있어 극동에서 전쟁기운이 강하게 돌고 있을 때였다.

서영해는 프랑스에서 극동전문가로 여러 언론에 일본이 일으킨 전쟁에 관하여 기고를 하였고 특히 베를린-로마-도쿄를 중심으로 전세계를 위협하는 전쟁을 예고하는 기사를 작성하여 그의 예지능력이 탁월했음을 알 수 있음을 발행된 신문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베르린 로마 토교가 축이 되어 세계을 위협하고 있다는 1938년 서영해 기고문

부산에서 일어난 서영해의 3.1운동은 중국망명과 프랑스에서 27년의 체류는 기자로서 이집트 미국 한인신문 프랑스 언론 등에 기고했다고 경찰문서는 밝혔다. 나아가 ‘한국인의 일생’ 등 저술활동을 통해 한국의 상황을 불어 소설화 하였다. 또 그는 임시정부를 대표하여 유럽 및 근 중동에서도 외교활동을 하여 많은 성과를 올렸다. 국제연맹 회원국이 아니지만 공식발언권을 얻고 일본제국의 잔악성을 알렸으며 프랑스 언론과 함께 지속적인 컨퍼런스를 통해 극동의 평화가 위협받고 있다고 전했다.

고려통신사 서영해가 쓴 <<한국인의 일생>> 책 표지

파리 외교위원회 대표 우사 김규식을 비롯하여 조소앙, 황의한, 서영해 활동은 파리에 거주하고 있는 아시아인들에게 많은 영향을 준다. 한국 3.1운동 영향을 받은 사람 중에 한 명이 베트남의 호치민이다. 그는 한국의 3.1운동처럼 큰 목소리로 저항운동을 해야 한다고 밝히며 프랑스에 정식으로 요구조건을 주장하기도 한다.

매우 각박한 상황에서 서영해는 폭탄이나 총이 아닌 글로서 독립활동을 몸으로 실천했다. 최초 아시안 인으로서 레지탕스 활동을 하였지만 아직 그 공식적인 자료를 찾지 못하고 있다. 그가 언제 어떻게 세상을 떠났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번에 찾아낸 프랑스 경찰 문서가 더 귀중하게 느끼는지 모르겠다. 한국주권을 뺏았긴 일본제국시절 불어권에서 한국 독립활동은 1919년부터 나타나기 시작하지만 어느 누구도 이 시기를 중심으로 논문을 찾을 수 없다. 부족하지만 독립을 위한 선조들의 열정을 본받아 지속적인 자료 찾기를 위해 노력을 할 뿐이다.

프랑스 경시청 서영해 문서 겉 표지

 

한불통신 오영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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