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2년 4월 29일 상해에서 윤봉길의사와 프랑스

1932년 4월 29일 상해에서 윤봉길의사와 프랑스

한불통신) 88년 전 오늘 1932년 4월 29일, 상해 홍구공원에서 윤봉길의사가 폭탄을 투척해 단상에 있던 일본군 수뇌들을 사살하거나 큰 부상을 입힌 사건이  터진 날이다. 이날은 일제가 상해를 점령하여 대외적으로 승전을 알리는 행사와 일본왕 히로히토 생일날이었다. 일본은 이미 만주사변을 일으켜 중국과 한국에게 일본은 공동의 적이었다.

윤봉길의사 보도 보도 공게

상해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있었던 곳이고 프랑스 통치구역이었다. 그 당시 임정은 프랑스 조계 정부와 사이가 좋았다. 프랑스와 일본과는 관계는 좋지 않았지만 나쁜 관계는 아니었다. 일제가 저지른 만주-상해침략전쟁으로 중국에서 자국이익의 손해 볼 것을 염려하고 있었다. 중국 장개석은 일본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어 매우 어려운 상태에서 반전의 기회를 엿보고 있었던 터에 윤봉길의사의 폭탄투척은 한국인을 다시보게 만든 사건이었다.  임시정부 김구도 이 사건을 통해 장개석정부와 가까워졌으며 재정적, 외교적 도움을 받는 동기다 되었을 뿐만 아니라 대외적으로 임정의 독립의사를 전세계에 알린 큰 효과를 가지게 된다.

윤봉길의사에 의해 살해된 일제군인 및 외교관

반면에 프랑스는 극동에서 벌어지는 위기가 자국에 영향을 미칠것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했다. 프랑스 언론도 중국에서 한국인이 일으킨 반일본 폭탄테러는 쓸데없는 짓이며 바보같은 짓이라고 폄하하는 기사들을 실었다. 이런 기사들은 프랑스가 가지고 있는 여러식민지에서 윤봉길의거에 대해 크게 보도하고 있어 이들 식민지령에 독립운동 영향을 미칠 것으로 두려워하고 있었다.  한국은 다른 식민지 국가들에 비해 식민지국가들 중에서는 처음으로  1919년 대규모 독립운동을 일으켜 약소국가 베트남 호치민과 알제레 독립운동에 영향을 미쳤다.

프랑스에서 11개 신문 및 상해 현지신문 1곳과 식민지령 신문 6곳에 윤봉길의사의 폭탄을 던져 독립운동사에 큰 획을 그었다.

윤봉길의사 폭탄테로 첫 페이지

윤의사의 폭탄투척으로 상해지역에 거주하고 있던 한국인들이 대거 일본헌병들에게 잡히게 된다. 이때 안창호의사도 여러한국인과 함께 투옥된다. 임시정부는 연관이 없는 한국인을 위해 임시정부 파리특파원을 하고 있는 서영해를 통해 석방운동을 벌린다. 서영해는 프랑스 외무부에 구명서한을 보내는 등 적극적인 활동을 벌려 잡혀있는 한국인들을 석방시킨다. 이를 김구, 조서앙에게 보고하는 서신도 남아있다.

윤봉길의사 홍구공원에 모인 2만 여명의 군중 속에서 터진 폭탄은 일본수뇌부들에게만 사망 혹은 부상을 입히고 중국인이나 다른 외국인들은 전혀 다치지 않게한다.  중국군 30만 여명이 못한 일을 한국인 한 명이 했다며 유명한 말도 있듯이 우리가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국제사회에 큰 영향을 발휘했다.

윤봉길 독립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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